서호주 퍼스에서 보내는 편지, Letter From Perth
by MMEL
Vol.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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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에서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편지이기도 하구요. 다음 주면 새해라는데... 믿어지나요?
엊그제는 크리스마스였죠. 여기 퍼스의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한여름이었어요. 그게 여전히 낯설고 신기한데, 그래서 더 재밌고 특별한 하루가 된 것 같아요.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어땠나요? 거리 위 트리처럼 반짝였나요? 그렇지 않았더라도 우리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요. 트리 따위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우리의 연말은, 연말의 우리는 그 자체로 반짝거리니까요. 한 해 동안 수고한 당신, 눈 부시게 빛나요!
오늘 편지에는 꿀처럼 삶에서 소중하고 유용한 가치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인터뷰 코너 디어마이허니Dear My Honey의 첫 번째 인터뷰, 화가 윤철과의 대화를 담아 보았어요. 그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혹시 지금 사랑 앞에서 주저하거나 머뭇거리고 있다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도리도리 젓고 있다면, 여기 사랑이 전부라 외치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세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어느덧 사랑으로 차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당신에게 사랑을 띄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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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y Honey 01
Love Is Always Part of Me
화가 윤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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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매일 퇴근 후 그림을 그렸다. 캄캄한 밤, 새하얀 캔버스를 칠하고 또 칠했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는 늘 허전했다. 그것이 사랑의 빈 자리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남자는 캔버스 위에 사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안에 조금씩 사랑이 쌓였고, 그의 그림 앞에 하나둘 사람이 모였다. 화가 윤철의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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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내 안에, 그림 속에
멜(이하 M) : 작가님은 그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시죠. “Love is always part of me”. 어떻게 이 메시지를 정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윤철(이하 YC) : 오랫동안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고 회사에 들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가 생각한 것과 현실이 많이 달랐어요. 그렇게 6년 정도 다니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됐고, 저 자신이 싫어졌죠. 그렇다고 어렵사리 들어간 회사를 포기하기보단 다니면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걸 하면 나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민해 보니 그게 그림이었어요. 무작정 자취를 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데, 막상 제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더라고요. 그게 있어야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어떤 사진전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한 여자가 자기를 끌어 안은 채로 누운 뒷모습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그 사진의 제목이 <Love is always part of me>였어요. 그 순간 ‘이거다!’ 싶었죠. 오랜 시간 내 안의 사랑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시작이 됐어요.
M : 직장 생활과 병행하며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YC : 힘들었죠. 초반엔 매일 퇴근하고 그렸어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다 보니 모작도 많이 하고 재료도 이것저것 써 보았어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서 완성한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래도 계속했어요.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거든요. 그동안 상상한 것들을 표현하니 갈증이 절반 정도는 해소되는 것 같았어요. 그치만 완전히 해소되려면 많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보고 공감해 줘야 하는데, 반쪽만 채워진 채로 1년 정도를 보내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짧은 시간 안에 그걸 이루려는 건 제 욕심 같아서 길게 보기로 마음먹고 계속해 나갔죠.
M : 나머지 반쪽이 비로소 채워진 순간은 언제였나요?
YC : 서촌의 ‘어피스어피스'라는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하게 되면서였어요. 제 생각이 담긴 그림들을 사람들이 봐 주고, 느껴 주는 걸 보면서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꿈 같았어요. 지금도 말하려니까 소름이 돋는데요. (웃음) 전시 중에 한 분이 전시장 밖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들어오셔서 구경하다 가시고는 다시 오셨어요. 그림 하나가 너무 눈에 밟힌다면서 사겠다고 하셨죠. 그분 댁이 수원이라 운송 업체를 통해 그림을 전달해 드리려고 했어요. 근데 그분께서 댁을 잠깐 비우느라 그림이 2시간 정도 문 앞에 놓여 있어야 했는데, 제 그림을 집 앞에 두게 해 죄송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감사해서 결국 직접 찾아가서 전달해 드렸어요. 그때가 그림을 처음으로 판매한 순간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림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사실 그림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림 하나하나를 똑같이 사랑해 주기가 쉽지 않아요. 새로 작업한 그림일수록 더 애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근데 누군가 내 그림을 온전히 사랑해 준다면, 그림 입장에선 그게 훨씬 행복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심지어 그분이 갤러리 대표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작가님이 사랑하신 만큼 이 그림을 사랑하겠다고요. 그 이후로는 내 그림이 누군가에게 간다는 건 몹시 기쁜 일이라고 확신하게 됐죠.
M : 그럼 작가님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YC : 신기하게도 그분이 사 가신 그림이 제가 제일 사랑한 그림이에요. 그 작업 이름이 <사랑>인데요. 내 안의 ‘나'가 밖으로 나와 ‘나'를 안아 주는 모습을 그린 건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만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림과 내가 딱 만난 느낌, 이 아이가 내게 나타나 준 느낌. 그런 느낌이 든 몇 안 되는 작업이었어요. 그 그림을 너무 사랑해서 똑같은 형태로 클레이를 만들었는데요. 참 소름돋는 게, 그 그림이 가장 먼저 팔렸고, 그림 옆에 둔 클레이까지 구매하고 싶다는 분이 두 분이나 계셨어요. 근데 걔라도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차마 판매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건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구나. 그림이 말을 하지 못하고 글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 그래서 왜 작가들이 작품 제목을 <Untitled>로 하는지 알겠어요. 굳이 달고 싶지 않은 거예요. 물론 다른 작가들이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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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클레이 작업이 나란히 놓인
어피스어피스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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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 작가님이 추구하는 그림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요.
YC :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느끼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단순히 ‘예쁘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한다면 훨씬 행복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의미를 끼워 맞추고 싶진 않아요. 예를 들면 제가 초록색을 좋아해서 어떤 그림을 초록으로 그렸을 뿐인데 나중에 그 색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은 거죠. 의미를 담아 그림을 그리되, 더 많이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이 보는 사람을 사유하게끔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랑’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생각하게 만든 건 아닌가 싶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더 열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아서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어요. 다른 작가들, 다른 분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하는지 알고 싶어서 책이나 다큐도 많이 보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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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건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구나.
그림이 말을 하지 못하고
글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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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베를린 전시에서 '숲'을 표현한 작업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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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수록 주게 되고, 줄수록 갖게 되는
M : 몹시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이지만 작가님께는 꼭 여쭤 보고 싶어요.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YC : 저에게는 사랑이 곧 ‘나에 대한 사랑'인 것 같아요. 요즘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정말 아무도 사랑할 수 없구나. 내가 너무 미우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질 수밖에 없고,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은 나 자신한테까지 상처를 주고… 그래서 근본적인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전을 했을 때 점점 제 그림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제가 조금씩 싫어지려 하는 거예요. 근데 관객분들이 그 마음을 다 메워 주셨어요. 그렇게 끝내고 나니까 저를 더 사랑하게 돼서 너무 행복한 거예요. 나를 사랑하게 되니까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고, 내 안에 사랑이 막 넘치고. 그래서 생각하게 됐죠. 사랑이라고 하면 ‘주는 것’, ‘베푸는 것’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제게 사랑은 결국 ‘갖는 것’, ‘가져야 하는 것’, ‘지키는 것'이겠다고요. 그래야 사랑을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으니까.
M : “나 자신을 사랑하자.” 이 말이 진리라는 건 알지만 너무 많이 회자되고 소비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되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고요.
YC : 맞아요. 꼭 한때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처럼.(웃음) 물론 그만큼 중요한 진리니까 그렇게 되었겠죠. 근데 저는 누구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완벽하게 나 자신을 사랑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글에서 읽은 건데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서 나의 밑바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래요. 그렇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는 거죠. 다만 나 자신을 사랑하기 힘들다고 해서 스스로를 혐오하게까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저를 너무 싫어했을 때는 열 가지 중 열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안 될까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중 두 가지 정도만 잘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되니 나를 싫어할 일이 줄어든 것 같아요. 그러려면 나를 더 잘 알아야 하죠.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점점 더 파고들려고 해요. ‘나는 왜 그림을 그리지?’ ‘내가 언제부터 그림을 좋아했지?’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자주 해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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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부트 카페’의 벽화를 그리는 윤철 작가의 모습 |
베를린 전시장을 찾은 꼬마 관객과 교감하는 윤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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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 지금 이 시기는 사랑과 혐오의 대립이 어느 때보다 팽배한, 차디찬 겨울 같지 않나 싶어요.
YC : 맞아요. ‘러브'와 ‘좋아요'가 넘치는 만큼 ‘헤이트'도 넘치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된 건 결국 자기 삶이 각박한 이들이 많아져서인 것 같아요. 매사가 불만이고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는 그런 사람들 우리 주변에 많잖아요. 그들을 지켜 보면서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생각해 보니, 대부분 여유가 없어요. 언제나 각박하고, 모두가 자기보다 뛰어나다 생각하고,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결국 사랑이 부족해지고... 물론 각자에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을 것이고 모두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죠. 제 안에도 그들과 같은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요. 무엇보다 그들만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지나치게 경쟁적인 구조의 문제도 크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구조만을 책망하면 답이 없겠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해요. 내게 주어진 조건이 1부터 10까지 있다면 열 가지를 다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잖아요. 일곱 가지 정도는 받아들이고 남은 세 가지 정도 안에서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사는, 그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살아가려 하고요.
M :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서인지 사랑에 있어서도 손해보려 하지 않는 마음,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마음이 더 만연해지는 것 같아요.
YC : 가끔 사랑을 힘들어하는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요. 누군가를 온전히 집중해서 사랑해 봐야 하고, 그 사람에게 정말 다 줘 보기도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해서 상대가 변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를 더 사랑하게 되고, 상대도 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선순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저도 한때 사랑에 있어서 주는 것을 망설이기도 하고 더 많이 요구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 온전히 줘요. 그게 가능해진 건 말씀 드린 대로 제가 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돼서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니까 정말 행복해지고 관계 역시 더 좋아지더라고요. 사랑이건 우정이건 모든 관계에서도 다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오래 만나 견고한 관계더라도 ‘난 요만큼만 줘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딱 그만큼만 돌아오게 돼 있어요. 자기가 더 손해보지 않으려고 상대에게 덜 주면 결국 사랑은 ‘0’이 되는 거예요. 물론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사람마다 그 편차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그 고리를 풀어야 해요.
M : 앞으로의 바람이 궁금합니다.
YC : 저는 그냥, 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자기만의 해석으로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랑을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준 사랑은 결국 저에게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제 안이 사랑으로 채워질 테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 그게 저에게는 진정한 행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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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과 어우러진 MMEL ACTIVE 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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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고 하면
‘주는 것’, ‘베푸는 것’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제게 사랑은 결국 ‘갖는 것’, ‘가져야 하는 것’,
‘지키는 것’이겠다고요.
그래야 사랑을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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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남도연 @nmdyn
온하고 쾌한 콘텐츠를 만들고자 합니다.
Contents
디어마이허니 Dear My Honey
꿀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달콤함, 소중함, 유용함 등 꿀의 다각적인 의미를 살려
우리 삶의 소중한 것을 묻고 답하는 인터뷰 코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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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편지는 어땠나요? 어떤 형태로든 더 사랑하고픈 연말이 되길 바라 보아요. 여기 편지지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아요. 화가 윤철의 작업 이야기와 삶과 사랑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전문을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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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지는 해를 건너 2023년 1월 10일 화요일에 도착할 예정이에요. 어김없이 꿀에 관한, 꿀 같은 이야기와 레시피 꾹꾹 눌러 담아 보낼게요. 이번 주 잘 마무리하고, 우리는 새해에 만나요.
미리 인사할게요. Happy New Year!
퍼스에서, 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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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에서 당신의 편지를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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